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워싱턴 (문단 편집) ===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낙향하다 === 2번의 임기가 끝나자 워싱턴은 대통령을 그만두고 바로 고향인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 이상 집권하게 되면 그것은 대통령이 아닌 '왕권'이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1101855&search_head=70&page=1|#]] [[미국 국회의사당]] 정중앙 돔의 천장에는 조지 워싱턴이 당시 주 개수인 13명의 천사에 둘러 싸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최대 권력을 미련 없이 의회로 되돌려 놓은 조지 워싱턴의 고결함을 신격화한 모습이다. 이러한 워싱턴의 절제력 덕에 미국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도한 정치적 [[모험]]인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 어떠한 추문이 있어서도 아니고, 깔끔하게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물러남으로써 새로 생긴 민주적 국가 지도자, 대통령직의 신성성을 더럽히지 않고 고귀하며 존경받는 자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인이라면 누구든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인이자 초대 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위치에 있던 본인이 2선까지만 하고 물러났으므로, 그 이상의 장기집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가 [[국부|그 워싱턴]]보다 잘난 놈임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주게 되었다. 당연히 이는 현재까지도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후임 대통령들은 워싱턴의 전례를 따라 암묵적으로 두 번 이상 대선에 나가는걸 금기시 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빼고는 시도하지 않았다.[* [[율리시스 S. 그랜트]]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경우 재선에 성공한 이후 퇴직했다가 나중에 3선에 도전했지만 당선에는 실패했다. 그랜트는 3선 준비 중 스스로 포기했고 루스벨트는 3선을 위해 공화당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분당까지 강행하며 나갔지만 [[우드로 윌슨]]에게 패배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경우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다 최다 득표를 했지만, [[벤자민 해리슨]]과 맞붙은 두 번째 선거 때는 선거인단 수에서 패해 당선되지 못하고 세 번째 선거에서 재당선되었다. 즉, 연임이 아니라 두 임기를 나누어서 했다는 말. 20세기 들어서야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관례를 깨고 4연임을 했고, 이것도 비판을 받아 이후 대통령 3선 금지가 헌법에 명문화되었다.] 이로써 '''독재자의 등장 가능성이 미연에 방지'''되는 효과가 있었다. 워싱턴은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총괄 지휘권자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인 만큼 군대마저 워싱턴 개인의 사병이나 다름없었고 연방, 공화주의자들의 지지 세력을 상회하는 인기를 혼자서 누리고 있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를 받았다는 것에서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거기에 8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신생국가 미국을 안정시키며 통치능력도 증명했다. 결정적으로 초창기 미국에선 종신 집권이 불법도 아니었으며,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의 종신 집권을 원하기까지 했다.''' 당시에는 대통령제에 전례가 없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황제 같은 군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워싱턴이 장기집권을 했다면 오랜 기간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했을 것이기에 미국에 도움이 되기까지 했을 것이다. 애시당초 '독재자'로 불리는 게 아니라 그냥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개국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세계는 어딜 보나 군주제가 거의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내려놓았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장기집권을 시작하는 데에는 단순한 권력욕만 아닌 자기 추종자들 챙겨주기, 후손들의 지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결하고 가겠다는 책임감, 자기가 키운 국가를 딴 놈이 망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등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는데, '''워싱턴은 그 모든 유혹을 모조리 뿌리친 것이다.''' 이는 본인의 확고한 신념, 철학과 초인적인 자제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례로 독립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783년 초, 대륙회의가 독립전쟁 기간 동안 밀린 봉급을 주지 않아 불만을 품은 루이스 니콜라 대령과 대륙군 장교들이 워싱턴에 편지를 보내 "대륙회의를 [[쿠데타]]로 뒤집어 엎고 장군님을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https://en.wikipedia.org/wiki/Newburgh_letter|뉴버그 편지]]를 보내고,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부관인 존 암스트롱 소령[* 나중에 미국 7대 전쟁장관이 된다. 음모에 대한 처벌은 받지 않았다.]과 군인들이 대륙의회에 최후통첩을 보낸다는 소위 '[[https://en.wikipedia.org/wiki/Newburgh_Conspiracy|뉴버그 음모(Newburgh Conspiracy)]]를 꾸미기도 했으나, 워싱턴은 군의 불만을 이해한다면서도 직접 '''후손들에게 군과 의회가 대립하는 비극의 역사를 물려줘선 안 된다'''며 명확히 거절한 뒤 군인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감정적으로 달래서 평화롭게 쿠데타 시도를 좌절시킨 적도 있었다.[* 여기서도 워싱턴의 미담이 하나 나온다. 대륙의회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병사들 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워싱턴이 병사들 앞에서 읽게 되었다. 워싱턴은 편지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자 품에서 [[안경]]을 꺼냈는데, 워싱턴이 안경을 쓰는 것은 비밀이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처음 본 수많은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런 병사들을 향해 워싱턴은 '''"제군, 부디 그대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네만 나 역시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 머리가 새하얘졌고 눈까지 멀어버렸네"'''라며 소회를 털어놓았고 수년 동안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독립전쟁을 치르느라 늙어버린 그들의 영웅이 몸을 불살라가며 마지막까지도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에 장중은 그대로 울음바다로 변했다. 그렇게 미국 최초의 반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이런 덕분에 워싱턴은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최고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워싱턴이 권력에 대해 가진 나름의 [[철학]]은 그의 [[https://kr.usembassy.gov/ko/george-washington-farewell-address-1796-ko/|고별사]](Farewell Address)[* 명칭은 저렇지만 워싱턴은 이를 직접 연설하지는 않았고 1796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에 내용이 발표되었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워싱턴은 ''''진정한 힘은 그 힘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세계의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명언이다. 덕분에 그냥 [[건국의 아버지들|독립전쟁 했던 흔한 위인 A]]가 될 수도 있었던 워싱턴은 미국의 역사를 넘어 '''세계사에 다시 없을 위인'''이 되었다. 역사에 '영웅'은 참으로 흔하지만, '[[독재자가 된 영웅|독재자로 변하지 않는 영웅]]'은 드물고, '본인의 의지로 권력을 내려놓은 영웅'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싱턴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이 미련 없는 퇴임이야말로 워싱턴의 가장 큰 업적이라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